제49회 한국시인협회 정기총회와 제40회 협회상 시상식
제49회 한국시인협회 정기총회와 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 시상식 참관기
서기 2008년 3월 20일 오후 6시, 서울의 충무로 남산 밑에 자리한「문학의 집, 서울」에서 한국시인협회가 주관하는「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과「제3회 젊은시인상」의 시상식과 아울러 제49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날 행사는 회원 약2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먼저 ‘제49회 정기총회’가 있은 다음,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이번의 정기총회는 평의원회의에서 새로 선출된 제36대 오탁번 회장의 인준 절차가 있는 중요한 총회이기도 하다. 문정영 사무차장의 사회로 진행된 정기총회는 이제 임기를 마치는 현 오세영 회장의 인사말씀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 박주택 사무총장의 지난 한해의 사업보고와 김영진 감사의 2007회계년도의 감사보고가 있었다.
※ 인사말씀을 하는 오세영 한국시인협회 회장.
※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
※ 유인물을 보며 사업 보고와 감사보고의 설명을 듣는 회원들.
그리고 임원선출에 들어갔는데, 평의원회의를 대표하여 김남조 시인께서 제36대 회장을 선출하게 된 경과보고를 하였으며, 총회의 인준을 회부하여 만장일치의 박수로써 인준을 처리함으로써 제36대 회장으로 오탁번 시인이 선출되었다. 뒤이어 이제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제35대 오세영 회장의 인사와 새로 선출된 오탁번 회장의 인사말씀으로 이어졌고, 계속하여 새로운 회장이 지명하는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심의위원장, 기획위원장, 상임위원장, 교류위원장, 발전위원장을 인준 처리하였으며, 상임감사와 기금감사를 선출하였다.
※ 평의원회의에서 제36대 회장을 선출한 경위보고를 발표하는 김남조 시인.
※ 이제 임기를 마치는 제35대 오세영 회장의 이임 인사말씀.
※ 제36대 회장으로 선출된 오탁번 신임회장의 인사말씀.
※ 신,구 회장의 인사말씀을 경청하는 회원들. (맨 뒷줄 맨 왼쪽에 필자가 보인다.)
정기총회가 끝나고 10분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최영규 발전위원장의 사회로 한국시인협회상 시상식을 거행하였는데, ‘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에는 원구식 시인의 시집 <마돈나를 위하여>가 수상하였고, ‘제4회 젊은시인상’에는 길상호 시인의 시집 <모르는 척>이 수상하였다. 심사위원으로는 이근배 시인, 오탁번 시인, 유안진 시인, 나태주 시인, 한영옥 시인이 맡았는데, 이근배 시인의 심사 경위보고가 있었고, 심사평은 ‘제39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한 한영옥 시인이 발표하였다. 곧 이어 시상식이 있은 다음 축사에는 이번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게 된 원구식 시인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김광림 시인이 해 주었고,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으로 이어졌다.
※ 한국시인협회 시상식에서의 인사말씀을 하는 오세영 회장.
※ 심사위원을 대표하여 한국시인협회상 심사경위를 보고하는 이근배 시인.
※ 심사위원을 대표하여 한국시인협회상 심사평을 발표하는 한영옥 시인.
※ 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는 원구식 시인.
※ 제4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하는 길상호 시인.
필자도 한국시인협회의 회원으로서 참석하여 함께 죽하해 주었으며, 시상식이 끝나자 화기애애한 가운데 모든 행사가 끝나고, 함께 준비된 만찬을 들며 삼삼오오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었다.
만찬까지 끝나고도 헤어지기 섭섭한 정은 무리를 지어 인근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늦도록 자리를 함께하며 정을 이어 갔다.
여기에 새로 선출된 제36대 오탁번 회장의 인사말씀과 한국시인협회상 심사평, 그리고 수상시인의 시집 표제작품을 함께 올린다.
※ 길상호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맨 오른쪽이 필자이다.)
[제36대 한국시인협회 오탁번 회장의 인사말]
현대시 100주년의 의의와 모국어 사랑
오 탁 번
올해는 현대시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海에게서 少年에게>가1908년 [소년] 창간호에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시의 기점을 어떻게 잡느냐하는 문제는 관점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만, 학계에서는 물론 일반 사회인들도 新詩라고 통칭되는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近代詩 혹은 現代詩의 출발점으로 널리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시인협회는 창립50주년을 맞아 <한국현대시사(민음사, 2007>를 펴냈습니다. 우리 詩의 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이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되는 중요한 임무입니다. 또 <국토사랑시집(천년의시작, 2007), <방언시집(서정시학, 2007)을 펴내어 나라사랑과 우리말 사랑은 바로 우리들시인이 타고난 운명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반세기 전, 한국시인협회가 창립되는 자리에는 조지훈, 박남수, 박목월, 이한직, 박두진, 이철균, 박양균, 김경린, 김요섭, 장수철, 김수영, 김윤성, 정한모, 송영택, 양명문, 조병화, 최재정, 최연희 박태진, 이상로, 황금찬, 김종길, 신동집, 김춘수, 이동주, 이종학, 이정호, 성기원, 장만영, 박화목, 석용원, 이봉래, 김종삼, 김차연, 장호, 유치환, 전봉건, 함윤수, 이경순, 유정, 이인석, 김종문, 이설주, 김해강, 김상화, 김동사, 이활, 천상병, 서정주, 김규동, 장서언, 조영암, 장호강, 이효상, 최계락, 이형기, 임인수, 신석초, 전영경, 김상원, 박기원, 신석정, 김현승, 오화룡, 한성기, 송욱, 김수돈, 설창수, 김남조, 이윤수, 이영순, 이덕진, 조향, 박훈산, 김상옥 선생이 계셨습니다. 바로 이 자리, 한국시인협회 총회 자리에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지녔던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지닌 회원입니다. 그분들과 우리는 ‘시인’이라는 예술적 DNA를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血族입니다.
시인들이 ‘목숨’보다 소중한 모국어를 지키는 불침번이 되고 파수병이 될 때 시인의 品格과 威儀가 한층 고양될 것입니다. 우리 모국어가 지금 심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시인들이 나서서 제 민족의 혼을 갉아먹는 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극우파나 극좌파보다 더 나쁜 매국노와 나를 게 없습니다. 우리 모국어가 일그러져서 마침내 자라나는 세대들이 ‘이국종 강아지’처럼 된다면 장차 통일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정한 통일은 부동산의 통일이 아니며, 정치권력의 통폐합이 아닙니다. 바로 모국어의 통일, 民族魂의 통일이 진짜 통일입니다.
한국시인협회가 새로운 반세기를 향하여 출발한 지금 이 자리는 그 역사적 의의가 우리 회원들한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현대시의 미래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물량적인 업적이나 처세의 눈가림을 뿌리치고 한국현대시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로지 ‘歷史 앞에서’ 혈혈단신으로 서있는 ‘견고한 고독’의 정신으로 시창작에 임할 때, 반세기 후의 우리들의 프로필이 더 자랑스러워질 것입니다. 미래의 과거인 오늘이 바로 역사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한국시인협회 정관 제3조에 “본 법인은 시문학의 발전과 시인의 공동이익을 옹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한국시인협회는 우리 현대시의 미래에 대한 모색과 공동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이웃의 농사일을 서로 거들어주는 두레처럼 ‘시인의 사회’도 서로 서로 힘든 일을 나누어 하며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나가야 할 것입니다.지금 우리 사회에는 불우이웃을 돕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민족애라는 오직 한마음으로 북녘의 그늘진 인민과 어린이들을 돕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詩魂을 지닌 고귀한 시인입니다. 이들을 외면하는 부끄러운 시인으로 살면 인 된다는 것은 한국시인협회 정관에는 ‘나와 있지 않은 前文’입니다.
[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
마돈나를 위하여
원 구 식
주님,
2000여 년 전 당신이 정죄하지 않은 이 여인을
돌로 내려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들이
매우 도덕적이고 학식이 높으며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서명한 성매매특별법이
단 한 명의 반대자도 없이
세계의 변방, 대한민국의 국회를 통과했을 때
저는 그저 숨어서
이 여인을 사랑했던
한 마리 바퀴벌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법이 시행에 들어간
2004년 9월, 끔찍했던 어느 하루,
저는 더욱 한심스럽게도
이 여인의 곁을
몰래 떠나버렸습니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주님, 이 법으로 인해
저와 이 여인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이 여인은
이제 벌거벗은 몸으로
이마에 주홍글씨를 붙이고
당신 앞에, 우리들 앞에 섰습니다.
병든 아버지의 약값도 없이,
어린 동생의 등록금도 없이,
생의 마지막 출구가 막힌 사람처럼
법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양극화를 해소하자는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이 여인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주님,
일찍이 법률만등주의자들의 천국인 청교도의 나라에서
금주법이라는 이상한 법률이
오히려 알콜 중독자들을 양산하고
마피아와 같은 조폭들을 길러내,
당신의 어린 양들을
살인과 폭력과 광기 속으로 몰아넣었음을
고매한 입법자들이 기억하게 하소서.
주류의 판매 및 양조를 금지하는 이 도덕적인 법률로 인해
대도시는 무허가 지하 술집으로 넘쳐나고
공무원들의 부패는 생쥐처럼 교활해졌으며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가난이 이 나라를 습격했음을
몽매한 우리의 위정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지구의 변방,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툭하면 대~한민국을 외치는
이 나라의 도덕적인 법률이,
성폭력범들과 양아치들을 양산하고
꽃다운 처녀들을 외국의 사창가로 내모는 주범임을
선량한 유권자들이 알게 하소서.
이제 실업자들이
빈 택시처럼 길거리를 배회하고
수많은 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을 것이며
밤거리는 소돔보다 더한
퇴폐의 매음굴로 변할 것입니다.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시인의 예지로 단언컨대
열심히 살고자 애쓰는
이 나라의 모든 남성들을 범법자로 만드는 이 법이
조속히 폐지되지 않는다면!
바닥을 친 경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며
국회의사당 꼭대기엔 에이즈의 검은 그림자가
성스러운 깃발처럼 펄럭일 것입니다.
주님,
2000여 년 전 당신이 정죄하지 않은 이 여인이
설사 쾌락과 방종을 추구했다 할지라도
당신의 귀하고 착한 어린 양임을 잊지 마소서.
저는 토끼처럼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이 여인에게
오늘도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런 詩 나부랭이조차 발표하기를 주저하는 심약한 제가
이 여인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변변한 먹거리도 없이
전쟁의 폐허가 휩쓸고 간 이 나라를
오늘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착한 백성들을 위해,
희미한 형광등 아래
얼굴에 분을 바르는 저의 마돈나를 위해
내려 주소서,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벼락같이 일깨워 줄
새로운 선지자를.
※ 원구식
1955 경기도 연천 출생
배재고, 중앙대, 숭실대 대학원 졸업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마돈나를 위하여」
현재 월간「현대시」발행인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발행인.
[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 심사평]
- 수상시집 : 원구식, <마돈나를 위하여>
우선 투표를 통해 이상호, 원구식 두 시인으로 대상자가 좁혀졌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원구식 시인을 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대상자로 확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수상시집인 원구식의 <마돈나를 위하여>는 ‘마돈나’라는 표상, 창녀와 성녀 이미지를 두고 맥놀이하는 모순의 표상을 설정, 각 시편을 이곳으로 빨아들이는 단단한 구심력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 권의 시집을 한 편의 詩처럼 응집하여 읽을 수 있다는 데서 우선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
시인의 자서에서 밝힌 대로 시인은 그간에 발표한 詩들을 재차 수정하여 이번 시집의 구심력을 모으는 데 고심하였다. 과작의 시인이 오랜 시일에 걸쳐 힘들여 얻은 작품을 다시금 퇴고하여 마련한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개성적 목소리와 소통의 회로가 함께 동시에 갖춰졌다는 데서 든든한 신뢰를 주었다.
이 시집은 ‘시간’에 바쳐지는 헌사라 해도 좋을 만큼 시인은 ‘시간’ 모티브에 주력하고 있다. 유년시절과 소년시절, 그리고 고향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이 시집은, 이후의 시간이 지나가는 모든 길들이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고향의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더구나 “죽음으로 몰고 가는 시간(「현대시」)”이 이 길 위의 어김없는 사건임을 직시하며 시인은 ‘시간의감옥’을 세밀하게 조망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나는 개방된 감옥에 갇혀있네(「우주는 나의 감옥」)”에서처럼 우주 또한 감옥으로 조망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한계 속에 내장된 모든 길의 닮음, 혹은 같음을 깊은 사유 끝에 실존의 조건으로 소중히 수납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시인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시간의 입자들을 “정밀한 숲(「정밀한 숲」)”으로 치환하며 “그 속에 집적된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은밀한 내부”를 성찰하고 “삶이 우리에게 즉각적인 대답을 요구할 때/하늘에서 빛나는 별(「별」)”의 우주를 우러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옥 속에서 인간은 “성스러운 필터(「성스러운 필터를 위하여」)”가 되어야 할 것임을 간접화하여 노래한다. 이 노래의 곡조는 앞서 말한 대로 ‘마돈나’의 표상으로부터 마련된다. 이 시집에서 ‘마돈나’는 세상의 감옥에 다름 아닌 이분법에 저항하는 핵심 기표다. 저항의 내밀하고 구체적인 곡조가 각 시편들에 골고루 실림으로써, 이 시집의 구심점은 보다 확고해지는 것이다.
원구식의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는 이유 없이 시간의 길목에 부려져 의미를 간구하는 인간의 몸부림은 그 자체로 “시간의 톱니바퀴이며/사색의 오랜 친구인 침묵의 노래(「네안데르탈」)”였음을, 또한 이 노래가 결국 “원시의 강물이며/그 힘”이 되어 다시 신화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된다. 표면적 모티프의 어둠과 이 어둠을 뚫고 튀어 오르는 생의 비의를 비춰주는 시편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리하여 다시금 ‘기원’, 그곳이다. 이 시집의, 의미의 응집력을 높이 사고 싶다.
심사위원 : 이근배, 오탁번, 유안진, 나태주, 한영옥
심사평 : 한영옥(시인, 성신여대 교수)
[제40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소감]
마돈나를 위하여
마돈나, 詩가 무엇인지 조금도 모르는, 더구나 자신의 천박함으로 인해 타인의 돌팔매를 묵묵히 견디는 성녀로서의 마돈나, 조선의 선비인 나 원구식은 자신의 무지와 헤픈 수준을 조금도 모르는 한국의 문학평론가들과 위선의 뻥으로 가득한 이념 장사꾼들의 무관심을 참고 견디며, 성스러운 당신의 이름으로, 제40회「한국시인협회상」을 받기로 했습니다.
마돈나, 당신의 이름으로 발간된 이 시집은, 조금이라도 세상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얄팍한 계산도 있지만, 조선의 선비인 원구식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음흉한 잡지 편집자들과, 자신의 저급한 시적 재능을 한탄하며 고수의 출현을 한사코 막아보려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 으레 뒤에서 저지르는 저급하고 섬뜩한 음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성스러운 당싱 앞에 바쳐졌음을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마돈나, 조선의 선비인 나는, 이 시집이 당신이나 혹은 나로 인해, 고귀한 작품이 마당히 받아야 할 경외심과 영예를 별로 받지 못한 채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멀어진다 해도, 머지않은 장래에 양심적이고 눈이 바른 현자들에게 발견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니, 오늘밤도 밤의 목거지에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제4회 젊은시인상]
모르는 척, 아프다
길 상 호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 길상호
1973년 충청남도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현대시 동인상, 이육사문학상 신인상 수상.
[제4회 젊은시인상 심사평]
- 수상시집 : 길상호, <모르는 척>
몇 번의 투표 끝에 길상호 시인에게 제4회 젊은 시인상의 영예가 주어졌다.
이번 수상 시집인 길상호의 두 번째 시집 <모르는 척>의 시편들은 그야말로 모르는 척 하며 삶의 비극적 모서리들을 담담한 삶의 풍경으로 치환한다. 척박한 모서리들에 시선이 닿아 있음에도 이 모서리를 두고 억지화해나 필요이상의 분기탱천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모르는 척, 아프다」에서처럼 詩 속의 주체들은 정작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픈 것이다. 다남 이를 ‘모르는 척’이라는 그 인식의 고양 안에 슬쩍 감추며 詩의 기율을 엄격하게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의 詩가 갖춘 미덕을 높이 우러르게 된다.
시인은 그의 시선이 가 닿은 심란한 현실을 능란하게 또한 엄정하게 말로 바꾸는 그 과정에 몰두하면서 주체의 내면을 조절해간다. 이에 시편들은 격조의 수준을 고르게 유지해나가게 된다. 이는 텍스트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을 반듯하게 잡아주려는 시인의 노고를 짐작하게 한다. 이렇듯 詩의 격을 옹골차게 유지해가는 그의 기본자세에서 앞으로의 무한한 시작 용량을 가늠할 수 있었기에 심사위원들의 합의를 모을 수 있었다.
말한 대로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는 그의 시편들은 한 편 한 편 날카롭다. 여기서 날카롭다는 것은 의미의 핵심을 투사하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떠내는 솜씨와 이를 중심으로 면밀하게 텍스트를 짜 나가는 능란한 솜씨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리하여 길상호의 시편들은 끓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다. 그야말로 깔축없이 단호하다.「향기로운 배꼽」,「어미를 먹은 기억」,「風磬소리」등의 비교적 짧은 詩에서 보여주는 이미지의 밀도와 이에 내장된 삶의 비극성은 독자의 가슴 속에서 그 농도를 풀어놓으며 울먹하게 따뜻해질 것이다. 한편「어떤 노숙자」,「버려진 손」,「거주자 우선주차구역」등 서사적 줄기가 들어앉은 시편들에서는 신산한 삶을 질척임 없이 반죽하여, 냉정하게 대상화한다. 이 오브제에 물을 붓고 질척하게 반죽하여 눅진한 삶과 한 판 붙어야 하는 건 역시 독자의 몫이다.
이렇게 하여 길상호의 詩는 결국 ‘詩’ 그 자체의 완성도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텍스트의 존재, 그 존재성을 최대한 살려낼 때만이 읽는 이의 의식 속에서 한 편의 詩는 풍경소리로 오래오래 풀어지며 의미화 된다. 한 편의 詩가 읽는 이의 존재론적 변환을 가져오는 그 일이 여기에서 가능한 것임을 그의 시편들은 다시금 귀하게 확인시켜준 셈이다.
[제4회 젊은시인상 수상소감]
소금우물을 긷는 마음으로
詩가 무엇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알 것 같다가도 뒤돌아서면 또 깜깜해져 길을 헤매곤 합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힘들지만 아름답게 발버둥치는 별빛들이 있어, 그 빛을 따라가며 詩를 써왔습니다. 아득한 거리에서 빛나지만 분명 거기 있는 詩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차마고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바다였다가 지각변동으로 그 험악한 지형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소금물이 솟아나는 우물도 생긴 것이지요. 척박한 땅에 소금물까지 없었다면 그곳은 사람이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곳 여인들은 계단을 타고 우물 깊이 들어가 30Kg에 달하는 소금물을 하루에도 이삼백 번씩 져 나르고 있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들의 발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그곳에서는 소금을 태양과 바람의 선물이라고 한다지요. 그렇게 소금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고 나면 사람과 야크가 나누어 먹으며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일진대 그들의 얼굴에는 원망의 표정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詩를 쓰는 일도 결국 시대의 눈 속에 들어가 끊임없이 눈물을 퍼내는 작업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그 노동으로 소금 같은 문장의 결정체를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의 고통 없이 만들어진 詩는 좋은 詩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너무 뻐근해서 종종 물통을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복사꽃처럼 새하얀 소금을 만들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상은 제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또 한 번 마음의 끈을 질끈 동여매게 할 것입니다. 어깨 위에 다시 물동이를 얹어주신 한국시인협회와 심사위원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늘 지켜주시는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힘이 납니다. 앞으로 이 상이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