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시집 (6)

버어먼초

청수거사 석당 2015. 5. 20. 21:12

 

한국의 야생화 시집 (6) [그냥 꽃이면 된다]




버어먼초


낙엽이 많이 쌓여 썩어야겠다
그래야 저렇도록 맑은 꽃이 피어날 것이다
낙엽 썩는 내음은 구린내 나지 않고 향긋하기까지 하여
향기니 냄새니 하며 다툴 일 없어 좋겠다
울울창창 나무숲
환한 햇살이 없으니
석장이라는 버어먼초
광합성작용으로 푸르게 잎 틔우는 골머리 쓰지 않아도 되고
푸른 잎 없다고 풀이다 아니다
꽃에 향기가 있느니 없느니 시샘할 일 없어 좋겠다
낙엽이 썩는다고 땅까지 썩는 건 아니므로
오히려 땅이 더 건강해지는 것이니
어느 누구 눈치 볼 일 없어 맘 편히
썩어가는 낙엽 위에 제대로 뿌리를 박을 수 있겠다
햇빛 한 오라기 없는 시큰하게 어두컴컴한 검은 숲에서
저리도 수정같이 맑은 몸으로
하얗게 웃으며 노란 목소리로 조잘조잘 노래할 수 있게 하려면
나무들은 더 열심히 잎을 키우고 많은 낙엽 떨어뜨려 주어야겠다
그리하여 세상 찌꺼기란 찌꺼기 다 낙엽 썩듯이 썩어
누구든 건강한 땅에 튼실한 뿌리의 발을 딛고
기나긴 면벽수행의 공력 높은 노스님 같은
저 버어먼초처럼
생을 놓는 마지막 순간까지
투명한 無心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가슴에도
나이 들수록 더 많은 낙엽이 내려쌓여
썩어가는 냄새 점점 물컹해지는 지금
입멸 후 사리 남기듯
버어먼초 몇 송이쯤 마알갛게 자라고 있으면 좋겠다





※ 버어먼초 : 버어먼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석장」이라고 한다.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 작용을 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낙엽에서 영양소를 빨아먹는 부생식물이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에 자생한다. 전체가 흰색을 띠고 단순하게 생긴 줄기는 곧게 선다. 비늘 모양의 잎은 피침형 또는 좁은 계란형으로 끝이 뾰족하며 줄기를 감싼다. 9~10월에 줄기 끝에서 1~5송이의 꽃이 피는데 아래쪽의 화관(花冠)은 흰색이고 위쪽의 꽃잎은 노란색이다. 병아리 주둥이같이 생긴 노란 꽃잎이 완전히 벌어지지 않고 살짝 오므린 채로 꽃의 속이 보이지 않는다. 9~10월에 좁쌀보다도 더 작으리만치 아주 자잘한 열매가 갈색으로 익는데 씨가 매우 미세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