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 庶民 情緖가 갖는 意味 ㅡ 꽃으로 이야기하는 庶民 情緖 (글 : 서지월)
한국의 야생화 시집 (2) [빈 산 빈 들에 꽃이 핀다]
/해/설/
庶民 情緖가 갖는 의미
— 꽃으로 이야기하는 庶民 情緖—
徐 芝 月
(시인 * 대구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전공 주임교수)
1.
金承基 시인이 야생화에 대해 쓴 100편의 詩를 대하는 순간 필자는 감개무량했다. 왜냐하면, 많은 시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문단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야생화 시편들이 그냥 쓴 게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꽃 이름을 나열한다고 詩가 되지는 않잖은가. 그 꽃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속성과 시인의 감성이 맞아떨어져야 하며, 표현방식 역시 제 각각의 목소리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서정시 그 자체로 머물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민족혼과 서민정서가 함께 융화되어 번져 나올 때, 그것이 우리의 숨결이 되며 또한 진정한 한국의 서정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편들이 갖는 의미는 우리의 야생화 그 자체를 읊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짚신이나 검정고무신을 끌고 숨찬 아리랑고개를 넘어왔듯이, 면면히 이어져온 서민의 哀歡과 情緖가 뚝배기 같은 질그릇에 담아낸 장맛으로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혹자들은 미련하다고 볼지도 모르나, 국적불명의 어휘놀음보다 훨씬 값진 우리의 정서를 담아낸 시편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가지런한 정서가 이 시집의 시편들인 것이다.
특히 金承基 시인은 속초의 李聖善 시인의 제자로서, 그 문하에서 詩를 쓰고 함께 행사도 개최한 시인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운명을 달리했지만 李聖善 선배시인은 늘 필자에게 있어 존경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한국시단에서 朴在森 선생님 다음으로 가장 속물적 근성이 없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코 필자는 李聖善 선배를 꼽아왔던 것이다. 바로 그런 어느 때, 속초의 李聖善 선배시인께서 "물소리詩낭송회"의 행사에 머나먼 대구 땅에서 문학활동을 하고 있는 필자를 초청한 것이다. 그때, 기분이 아주 좋았던 일이 있었는데, 필자가 속초의 "물소리詩낭송회" 초청시인으로 내정된 것을 속초의 지역신문에서 알고는 미리 소개하겠다며 지상 인터뷰를 요청해 왔었다.
그리하여, 필자에게는 평소에 설악을 노래한 詩가 있어, 그 詩와 함께 세세하게 소개되어 나온 것으로 안다. 문학행사가 아니었더라면 자주 오갈 수 없는 곳이 속초 땅이기도 하다. 그러한 속초는 李聖善 선배시인의 詩에서도 자주 등장하듯이 신비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면서도 禪적인 세계와 같은 곳으로 받아들여졌기에, <물소리詩낭송회> 행사에의 초청은 참으로 의미 있는 나들이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제124회 <물소리詩낭송회>로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崔明吉 선배시인을 비롯하여 젊은 시인인 金承基 시인을 알게 되는 인연을 가진 것이다. 혈기 넘치는 속초의 여러 젊은 시인들과 1박 2일을 함께 보내며 단풍든 가을날의 울산바위를 정상까지 오르는 산행도 감행한 아주 찰진 추억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李聖善 선배시인을 떠올리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삶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설악산의 백담사 앞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한번 가면 오지 않는 시간들이 시인들에겐 더없이 그립고 애틋한 게 사실이다.
그나마 金承基 시인이 건재해 있어 필자와 지금도 교류하며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李聖善 선배시인께서 지금까지도 살아계셨더라면, 아마도 속초의 선배시인, 아니 스승이 되는 李聖善 선배시인께서 분명히 맑은 눈빛으로 이 시집의 원고를 찬찬히 읽어 내렸으리라. 그것이 우연찮게 이 머나먼 대구 땅의 필자에게로 뻗쳐왔고 보면 인연의 소중함도 이런 데에 있나 보다.
우리가 詩를 쓰는 일이란, 그저 詩를 쓰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교분을 맺고 함께 詩의 향기에 취하며, 또한 함께 숙독하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시인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여기서 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와 金承基 시인의 경우, 마지막인 것 같기도 한 속초의 물소리를 느끼며, 그래도 그가 열심히 詩를 써오고 있는 노력은 참으로 장하다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번 시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친환경 친자연주의를 표방하는 100가지의 생명이 담긴 꽃들의 잔치는 끈질긴 노력과 치밀한 사유 없이는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리라. 金承基 시인의 이러한 詩적 내공이 깃들여 있는 시집이 바로 이『빈 산 빈 들에 꽃이 핀다』일 것이다.
2.
「序詩」에서 金承基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풀/나무, /꽃이 아닌 게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내 어두운 마음밭에서도/등불이 되는 꽃을 가꾼다>고 했으니, 꽃에 대한 생명의지와 자신에 대한 존재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100가지의 꽃을 두고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양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特長이 보이는데,「겨울을 앓는 복사나무」의 경우, 사람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있듯이 겨울의 복사꽃나무를 통해 자연의 세계도 인간세상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그 한 예라 하겠다.
뿐만 아니다.「방가지똥」이라는 詩에서는 관점의 넌센스(nonsense)가 호소력을 자아내고 있다. 분명히 가시엉겅퀴라고 생각했으며 보랏빛 꽃을 피울 거라 여겼는데, <뒤늦은 가을에 와서야 피우는> 노란색의 꽃 즉, 방가지똥이었으니 어리석은 착각이 인간에게도 있음을 넌지시 암시해주는 敎示的 안목이 놀랍다. 시인의 말처럼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두가 행복인 것>이다.
「두메양귀비」는 백두산과 같은 높은 지대에서 자라는 고산식물인데, 속초 청호동의 아바이 마을에 관상초로 심어져 피어 있는 것을 보고 <함경도에서 피난 내려온 실향민>의 꽃으로 보고 있다.
「좀비비추」에서는 꽃의 속성을 <너무 쉽게 써버린 사랑>으로,「산목련」에서는 산사의 뜰에 피어나 달밤에 향기를 퍼내다 지는 것을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사미승/가슴에서 툭 툭/떨어져 내리는 꽃잎>으로 묘사하며, 산목련꽃과 사미승이 一體를 이루고 있는 놀라운 세계도 만나게 된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모과꽃」에서 시인은 <누가 너를 못난이라 하느냐/사람의 눈으로 자연을 들여다본다는 것/아주 조심스런 일이야>라고 하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쉽게 규정해버릴 일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모과꽃이 피어서 정성스럽게 모과 열매를 키우는, 그래서 <그 달디 단 향>이 가을을 듬뿍 적시고 하늘이 깜짝 놀란다는 사실을 안다면, 모과의 그 외모만을 보고 단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부처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 해서「불두화」라 불리우는데, 시인은 <나는 지금 공부 수행중>이라는 착안을 해내고 있는가 하면,「괭이밥」에서는 악착같이 살아가는 끈질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며 <힘찬 박수를 보낸다>고 힘을 보태고 있다.
기다림의 상징인「기린초」, 합장한 기도의 손 같은「노루발풀」, 핏물 뚝뚝 흘리는「석류」, 누명의 꽃이름인「도둑놈의갈고리」, 얄궂은 이름의「쥐오줌풀」,「노루오줌」,「애기똥풀」,「소경불알」,「개불알풀」,「광릉요강꽃」,「여우오줌」,「며느리배꼽」등에서 보듯이 시인은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인간이 이름 붙여 지어낸 풍자성을 세세하게 적어내고 있다. 인간의 삶과 함께해 온 꽃이름들이 정겹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꽃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저절로 쉽게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는데, 이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이러한 외경심이야말로 만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이 서로 아우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찮은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꽃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계급의 높낮이나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제 나름대로의 개성과 풍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시인은 항변한다.「미치광이풀」에서,
사람들아
너희들이 미쳤지 내가 미쳤느냐
오로지 꽃 피우기 위해
온 힘을 다했을 뿐,
그래서 피워 올리는
자주색 종소리
미친 세상을 향한
평화와 사랑의 종소리 들리지 않느냐
ㅡ 詩「미치광이풀」에서
이렇게, 이제는 못 참겠다는 듯 인간들을 향해 질타하며 항거한다. 그래도 <아름다운 종소리 들려주려고/한평생 뜨겁게 살아온 몸>인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너희들이 지은 죄 내게 덮씌운다고
마음이라도 한결 가벼워지더냐
엎질러진 물은 말라버려도
그 뒷자국은 남느니라
ㅡ 詩「미치광이풀」에서
시인의 언성은 미치광이풀을 통해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엎질러진 물은 말라버려도/그 뒷자국은 남>는다는 이 찡한 표현의 一喝이 뭉클하게 가슴으로 안겨든다.
내 작은 몸으로
세상을 주름지게 한 일 없건만,
누가 주름이 졌다 하는가
발길에 채이며 밟히며
꽃 피우는 몸부림
스스로 주름지게 했는지 몰라도,
크니 작으니
도토리 키 재기로
부대끼며 사는 땅
누구나 이만큼의 주름살도 없이 살까
ㅡ 詩「주름잎」에서
역시, 인간이 지어 붙여준 이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꽃며느리밥풀」도 보면, 왜 하필이면 <며느리밥풀>이냐 라고 항거할 만한 이름이지만, 이 꽃으로 대변되고 있는 恨 많은 삶을 살아온 며느리의 情緖를 살펴보면, 인간의 삶이 꽃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애기며느리밥풀」까지 생겨났으니, <사랑이 깊어야 꽃이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꽃으로 사는 삶 또한 인간의 삶과 같이 그 풍상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보면 말이다.
「쓴풀」이라는 꽃 이름도 재미있다.
많은 풀들이
꽃도 향기도 없이
보잘것없는 들풀로 나서
짧은 생을 사는 세상
그래도 너는 향기 짙은 꽃을 피우지 않느냐
온몸으로 쓴맛 토해내며
몸부림치고 있지만
계속되는 쓰라림 속에서도
잠시잠깐 희열도 보람도 있지 않느냐
삶이란 고통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것
무엇이든 생명으로 산다는 건
축복 아니겠느냐
ㅡ 詩「쓴풀」에서
자주 자주 情을 쏟으며
그렇게 살아야 하느니라
삶이란 게 어디 괴로움만 있다더냐
매일 눈물 흐르는 삶도
온몸으로 살다 보면
가끔은 기쁨도 찾아오느니라
보잘것없는 들풀로 나서
짧은 生을 살지라도
마음은 하늘에서 별로 피어야 하느니라
— 詩「자주쓴풀」에서
이처럼 시인은 항상 불만을 토하며 항변만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생명들을 위한 위안의 정서를 노래하기도 한다.「말똥비름」에서도 <말똥 쇠똥 뒤집어쓰고/발길에 채이며/많은 세월을 무시당했느니라>며 독백체로 풀어내고 있는데,
그래도 살아야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다 뜻이 있어
이 세상에 나왔을 터,
꽃을 피우고 나야 죽어지는 목숨
작지만 눈부시게 피워야지
— 詩「말똥비름」에서
비록 곱지 못한 이름을 가지고 무시와 천대와 구박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유를 위안의 정서로 노래하면서 素朴美를 곁들인 애정 어린 눈길이 돋보인다.
「쥐손이풀」역시 <바람에 씻어내면/뒤집어쓴 汚名을 벗을 수 있겠느냐>에서 보이듯이 대개의 꽃들이 천형의 운명을 타고난 듯한 좋지 않은 이름을 지니고 있음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적하지만, <눈빛이 맑아야/보는 것마다 슬프게 아름답지 않겠느냐>고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내공의 어조로 호소력을 동반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사마귀풀」에서도 <너야말로/잘못된 이름으로 불려지는/불명예를 걸치고 사는 일생>으로 비춰지기 일쑤이지만 <어느 누구를 또 속이려고/청아한 몸단장으로/꽃>이 되어 있는지 시인은 눈을 뗄 수가 없다.
「타래란」을 보는 시각도 예외는 아니다.
어여쁜 꽃을 달고서도
무슨 심사가 뒤틀려 온몸이 꼬였느냐고
수군덕거리지들 말거라
지구가 자전 공전을 하며 허공을 맴도는
이 땅에 뿌린 내린 몸이니라
ㅡ 중 략 ㅡ
지금은 세월이 어지러운 땅이니라
삐딱하게 기울어진 지구축이
바로 서는 날
배배 비틀린 이 몸도
말끔하게 풀릴 것이니라
그래도 몸은 꼬였을망정
뿌리까지는 뒤틀리지 않았느니라
— 詩「타래란」에서.
이렇듯 시인의 눈은 범상치가 않다. 이 많은 야생화 하나하나의 특성을 잘 살려 프레이즈(phrase)를 펼치는 상상력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오랜 시간을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지켜본 결과이리라.
본바탕은 흰색이었어
살다 보니, 살아가다 보니
물이 들더라구
물들지 않으려고 애 많이 썼어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안간힘도 써봤어
마음을 비우면 본바탕을 되찾을까
공부도 많이 했어
늙어가면서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 했는지 몰라
이만큼이라도 하얘지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몰라
오랜 고행이었어
아직도 수행을 더 해야겠지
반드시 가야 하는 길
끝내 본바탕을 찾지는 못할지라도
지금의 빛깔은 그대로 간직할 거야
앞으로 내딛는 발길
힘들다고 여기서 멈추면
어떤 수행으로도 더는 지울 수 없는
진한 물이 들 거야
ㅡ 詩「미색물봉선」에서
이 詩에서 보면, 더욱 절절하게 와 닿는 게 고행의 삶인 것이 역력히 드러나 보인다. 시인의 풍성한 감성과 상상력의 하모니(harmony)로 빚어낸 목소리들이다. 거기다가「미색물봉선」을 보면,
외로운 산길
지금까지는 홀로 걸었지만,
이미 누군가 앞에서 걸어갔을 것이고
걸어가고 있을 것이고
뒤에서 누가 또 걸어올 것이니
걷다 보면
함께 만나 길동무 될 거야
행복한 산행이 될 거야
ㅡ 詩「미색물봉선」에서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치밀한 상상체계는 튼튼한 의미망을 구성하는데 조금도 헐렁하거나 손색이 없어 보인다.
바보처럼 산다는 것이
힘든 일이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잎에 주근깨 돋아도
속상하지 않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녹녹해지는 하늘
사랑이 무거워 고개 숙인 거야
世人의 손가락질이야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부러움과 질시의 눈빛 아니겠니,
살짝 눈 감으면 그만이지
ㅡ 중 략 ㅡ
바보처럼 산다는 것이
바보는 아닌 거야
ㅡ 詩「바보여뀌」에서
각각의 꽃의 용모를 바라보며 읊어내는 시인 특유의 육성이「바보여뀌」에서도 현저하게 드러나 보이는데, 대상 하나하나의 특성을 실감나게 잘 살려내고 있다는 장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생을 살면서 슬플 땐 울고 기쁠 때는 웃으며 함께 아파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네 (詩「잎갈나무」)>에서도 시인의 육성은 잘 드러난다.
詩「개구리밥」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개구리밥이라는 浮草의 삶을 인간이 살아온 역사적 공간과 시간에 비유하고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뿌리를 지닌 생명인데
떠돌고 싶어 유랑하고 있겠느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데
꼭 있어야 된다지 않느냐
물 위에 띄우는 삶도
구성진 역사의 노래가 되지 않겠느냐
우주의 거울로 보면
그 어떤 삶이든 모두
떠돌이의 몸짓 아니겠느냐
ㅡ 詩「개구리밥」에서
그러면서 시인은 또 <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이리저리 떠도는 몸이지만/분수 넘치는 욕심이라도 부린 적> 없으며, <벼 포기 사이사이마다 띠를 둘렀어도/농작물에 해 끼친 적 없>는 무심무욕을 노래하고 있다. 개구리밥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 모르지만, <개구리가 언제 풀을 먹었던 적 있었더냐>고 반문하면서 대상에 대한 접근방법까지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파대가리에게 파꽃이 하는 말」이라는 담론적인 작품에서도 시인의 진지한 시적 상상력이 묻어나고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닮지 말게나
밋밋한 생애
진창 굴헝에 몸 담그고 살아도
나보다야 나은 삶 아니겠느냐
겉으로는 부러울 게 없어 보여도
평생을 이룬 것 없이 살아온 生이니라
비우려고 애를 쓰면
더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는 속내
멋지게 씨봉을 뽑아올려도
짓물러 터지며
설운 눈물 쏟게 만드는
아리고 매운 향
하얀 속살에서 진물이 흘러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사는 몸이니라
ㅡ 詩「파대가리에게 파꽃이 하는 말」에서
한 통속이면서도 파꽃과 파대가리의 유기적인 관계가 뉘앙스(nuance)를 풍겨준다. 뿐만 아니라,
꽃을 찾아 詩를 쓰며
不惑을 넘기고 知天命을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오류를 바로잡는 시간이 너무 길었구나
뜰에서 기르는 국화도 집을 나가면
들국화로 불려지는 것,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 알고 그르쳐 왔을까
얼마큼 동뜬 세월을
저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으로 또 아파할까
ㅡ 詩「구절초」에서
이와 같이 꽃을 대하며 바라보는 인식체계가 명확하면서도, 아울러 그 속에서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사유의 목소리가 육화되어 나오는 울림이 더욱 진폭을 넓혀주고 있다.
하늘아
너를 너무 아프게 했구나
온몸의 가시
나를 지킨다는 방패가
네 가슴을 찔러대는 송곳인 줄 몰랐구나
ㅡ 詩「탱자나무」에서
위의 작품에서도 하늘과 탱자나무의 가시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의미망 형성의 상응관계에서 만만치 않은 바탕을 깔고 있음이 확인된다.
곱게 차린 한복
허리 질끈 동여 옷섶 여미고
부채춤을 추는
조선의 여인이여
두 손으로 받쳐 든 부채
화려해도
옛날 보부상들이나 쓰던 패랭이
가슴 아픈 멍에를 지고,
가냘픈 어깨 위에
고된 세월을 얹어 살아온
한풀이인가
살풀이인가
ㅡ 詩「패랭이꽃」에서
이제라도 고운 이름으로 다시 불러주어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을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기품 서린 四君子에는 들지 못하더라도, 품속에 가득 담긴 난과 식물의 긍지를 개불알이나 소오줌통으로 비길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ㅡ 詩「복주머니꽃」에서
위 두 편의 작품 역시 패랭이꽃의 이름에 대한 애환과 복주머니꽃의 이름에 대한 감동이 풍자성을 가미하여 진하게 묻어 있다.
<무얼 잡으려고 허공을 움켜쥔 채/내려놓을 줄 모르느냐 (詩「매발톱」)>이나, <얼마나 속을 태웠으면/피 흘리며 꽃 피우느냐 (詩「꽃무릇」)>, <붉디붉은 깨달음을 얻고서도/온몸 가득 가시를 둘러쳐야 되겠느냐 (詩「가시연」)>, <정말 흔들렸을까 (詩「강아지풀」)>, <지상에 묶인 몸이어도/물속에서처럼 헤엄치고 싶은 걸까 (詩「지느러미엉겅퀴」)>, <산다는 건 홀로 드라마 (詩「무화과나무」)>, <어디서 오는 불빛일까 (詩「초롱꽃」)>, <누가 뭐라 해도/어여쁜 새색시 (詩「분홍할미꽃」)>, <당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詩「홀아비바람꽃」)>, <이제는 더럽혀질 일 없겠지요/쳐다볼 일도 없겠지요 (詩「별꽃」)>, <끝없는 외줄기 사랑 (詩「홀아비꽃대」)>, <돌을 침대 삼아/나무 등걸을 베게 삼아/꼭 공중에 터를 잡아야만 했을까 (詩「풍란」)>, 이처럼 사연 없는 이름이 없으며 저마다 짊어진 운명에 처하지 않은 꽃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꽃 이름이 그냥 그렇게 아무렇게나 붙여진 이름이 아니란 걸 이번의 金承基 시인의 시집『빈 산 빈 들에 꽃이 핀다』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며 뜻 깊은 일로 여겨진다.
終結詩라고 명명한「꽃」이라는 맨 끝의 詩에서도 시인은,
꽃으로 살아야지
풀꽃이어도 좋고
나무꽃이어도 좋은
다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게
향기는 없어도 그만
있더라도 진하지 않게
야생의 꽃으로 살아야지
ㅡ 詩「꽃」에서
라고 적고 있다. 풀꽃이든 나무의 꽃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범속한 素朴美, 거기다가 <향기는 없어도 그만/있더라도 진하지 않>으면서 <다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이 대목에 와서는 친자연주의의 노선을 명확히 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인이 말하는 꽃에 대한 사랑이란 일반론적인 친자연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 詩 전편을 통해서도 명백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야생화 자체를 노래하고 있는 음풍영월이 아니라 낱낱의 꽃이름 - 풀이름 또는 나무이름 - 속에 시인의 혼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즉, 투혼의 시편들인 것이다. 그리고 100편의 詩를 샅샅이 읽어내려 가면서 숨가쁜 시간이었음을 밝혀둔다.
궁극적으로 문장을 잘 다스리는 시인이 좋은 목청의 詩를 뽑아내는 법이듯, 金承基 시인의 詩가 만만치 않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전편의 詩들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의 한 가닥으로 <~하느니라>, <~이니라>, <~느냐>, <~더냐> 등의 종결어미를 동원한 의미 있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망 구축 또한 작품 구성상의 큰 장점으로 읽히는 대목들이다.
金承基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펼치는 프레이즈(phrase)는, 우리나라 야생화의 속성을 정확하고도 절절하게 파헤쳐가며, 그 속에 우리 민족이 살아온 삶의 애환과 민족혼을 서민의 정서로 담아낸 다큐멘터리(documentary)와 다름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의 파노라마(panorama)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의 노고가 짙게 배어 있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도 첨언하면서 남다른 의지를 보여준 설악산의 시인에게 부디 좋은 반응이 있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金承基 시인의 이번 시집 해설을 쓰면서, 그가 지금도 그리워하며 가슴으로 울부짖는 그의 恩師인 故 李聖善 선배시인께 바치는 필자의 詩가 있기로 여기에 소개하면서 펜을 놓을까 한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빛나던 별이 설악의 산정에서 내려와
이제는 백담사 골짜기의 물소리에
귀 열고 가버렸습니다
오지 않는 사람 되어 보이지 않는
영혼 되어 잘 피워내던 피리소리마저
멈추어버렸습니다
설악의 하늘 밤마다 뜨는 별은
그 별, 진 자리 옆에서 내려다보지만
산천과 초목도 힘주어 불러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렇게 남기고자 하지 않는 바람처럼
뒤 안 돌아보고 떠나버렸습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서둘러 먼저 가신 그 길 위에는
먼지 하나 일지 않습니다
ㅡ 拙詩, 故 李聖善 시인 추도시「別離에서」전문
우리는 남아서 아직도 詩를 쓰며 살아가고 있지만, 더 이상 쓸 詩가 없다는 듯이 세상을 훨훨 떠나신 故 李聖善 선배시인, 우리가 詩를 쓰는 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낙서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남겨진 것과 떠난 영혼 사이의 괴리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모른다. 별이나 물소리, 피리소리, 산천초목, 바람, 먼지, 이런 것들도 알고 보면 이승의 현상들인 것이다. 詩 또한 이승의 것이고 보면, 영혼의 세계에서는 번민이나 고뇌 자체를 훌훌 벗어던진 세계로 볼 때, 우리가 詩를 쓰는 행위도 바람이 풀잎에 와 닿듯이 이승의 몸부림이리라. 어디론가 향하기 위하여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