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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評論

졸시(拙詩) 「동자꽃」에 대한 어느 독자의 평설(評說)

졸시(拙詩) 「동자꽃」에 대한 어느 독자의 평설(評說)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DAUM 포털 사이트의 《玄山書齋》라는 티스토리에서 ‘복사골이선생’께서 2019년 3월 1일 16:49분에 필자의 졸저(拙著) [한국의 야생화 시집 제1집] 『옹이 박힌 얼음 위에서도 꽃은 핀다』에 실려 있는 제 졸시(拙詩) 「동자꽃」에 대해 과분하리만치 칭찬의 평설(評說)을 뒤늦게 이제야 보았습니다.
과분한 평설(評說)을 해 주신 ‘복사골이선생’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그 평설(評說)을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동자꽃



  김승기


  장대비 같은 햇살 머리에 이고
  찾은 절간에서
  동자야
  때 묻은 세상살이 주름진 얼굴
  청산에 흐르는 냇물로 씻어
  곧게 펼 수 있을까
  가슴앓이
  그 팔만사천의 번뇌를 지우고
  맑은 詩를 쓸 수 있을까
  지친 사람들 어깨 위에
  엉킨 실타래처럼 얹어진 억지들
  지금이라도 술술 풀 수 있는
  동심 되찾아
  따뜻하게 온 누리 빨아 널 수 있을까
  합장하였더니
  저만치 샘물 곁에서
  흐르는 냇물 들끓는 번뇌 그대로 두고
  엉킨 실타래도 그대로 두고
  물 한 모금으로
  마음이나 씻으라 손짓하네



※ 동자꽃 :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에 자생한다. 전체에 털이 있으며, 줄기는 곧게 서고, 마디가 뚜렷하다. 잎은 마주나는데 기다란 계란형으로 잎자루가 없고,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6~8월에 주황색의 꽃이 피는데 줄기 끝과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짧은 꽃자루 끝에 한 송이씩 달린다. 꽃받침은 기다란 곤봉 모양으로 끝이 5갈래로 갈라지며, 꽃잎은 5장으로 끝부분이 오목하게 패이고 납작하게 펼쳐진다. 8~9월에 타원형의 열매가 밤색으로 익는다. 한방에서 ‘전하라(剪夏羅)’라 하여 지상부(地上部)의 전초(全草)를 약재로 쓴다. ‘동자꽃’의 특이한 점은 고산성(高山性) 식물이므로 낮은 지대에서 피는 꽃은 색깔이 밝지 못하고, 꽃 자체도 힘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흰색의 꽃이 피는 것을 ‘흰동자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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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골이선생’의 평설(評說)]
 
‘동자꽃’은 석죽과 동자꽃속의 여러해살이풀로 일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울릉도를 제외한 전국 높은 산의 숲속, 경사지대, 산골짜기 등지에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여름 꽃이다. 꽃이 주황색에서 빨간색으로 끝이 2갈래로 갈라지는 특징이 있으며, 관상용으로 정원에 심기도 하는데, 근래에는 동자꽃속의 다른 종(種)들과 교배하여 많은 원예종이 개발되고 있단다. 동자승과 같이 예쁜 꽃이라 하여 ‘동자꽃’이란 이름이 붙었다는데, 식량을 구하러 간 큰 스님을 기다리다 눈 속에 죽은 동자승이 환생하여 피어난 꽃이라는 전설도 있다.

  김승기의 詩 <동자꽃>은 이 꽃을 속세를 벗어난, 어쩌면 초탈(超脫)의 경지로 풀어낸다. 詩 속 화자가 뜨거운 여름날 “장대비 같은 햇살 머리에 이고/찾은 절간에서” 동자(童子)에게 묻는다. 여기서 동자(童子)는 동자승(童子僧)이 아니라 절간을 찾아 오르다 눈에 뜨인 ‘동자꽃’으로 읽힌다. 먼저 물은 것은 “때 묻은 세상살이 주름진 얼굴/청산에 흐르는 냇물로 씻어/곧게 펼 수 있을까”이다. 속세에서 찌들은 삶의 흔적이 남긴 주름진 얼굴을 절간이 있는 산의 냇물로 씻으면 곧게 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답도 듣기 전에 화자의 질문이 이어진다. “가슴앓이/그 팔만사천의 번뇌를 지우고/맑은 詩를 쓸 수 있을까”. 그리고 “지친 사람들 어깨 위에/엉킨 실타래처럼 얹어진 억지들/지금이라도 술술 풀 수 있는/동심 되찾아/따뜻하게 온 누리 빨아 널 수 있을까”라 물으며 합장을 한다. 답을 해 달라는 뜻이리라. 아니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바람인지도 모른다. 화자의 질문은 모두 속세 즉 세상 살아가며 느끼는 것들이다. 시인으로서 좋은 詩를 쓰고픈 욕망 그리고 세상살이의 어지러움을 맑고 깨끗하게 펼치고자 하는 바람이리라.
  화자의 이런 질문에 동자는 아니 동자꽃은 뭐라고 답을 했을까. “저만치 샘물 곁에서” 피어 있는 동자꽃은 화자에게 “흐르는 냇물 들끓는 번뇌 그대로 두고/엉킨 실타래도 그대로 두고/물 한 모금으로/마음이나 씻으라 손짓”한다. 화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다. 오히려 속세의 번뇌는 물론 세상살이 어지러움까지 그대로 두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우선은 화자의 마음이나 씻으란다. 사실 동자꽃이 그렇게 답을 했을 리가 없다. 샘물 곁에 피어 있는 동자꽃을 보며 화자가 느낀 것이 분명하다. 바로 동자꽃 모양 혹은 그 자태가 전하는 어떤 깨달음이리라.

  詩를 읽고는 문득 비틀즈의 노래가 떠오른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Mother Mary comes to me/Speaking words of wisdom,/Let it be.(나 자신이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성모 마리아께서 다가와/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셨지/"Let It Be"라고.)’. 물론 ‘Let It Be’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연스런 우리말로 옮기면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동자꽃의 답도 그런 뜻이 아닐까. 세상살이에 얽매이지 말고 번뇌는 번뇌대로, 엉킨 실타래는 그것대로 그냥 내버려두라지 않는가. 그저 네 자신의 마음이나 씻으라는 말 - 온갖 번뇌에 혹은 아등바등하는 삶의 구렁텅이에서 애 끓이지 말고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있는 것은 있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 어쩌면 속세를 벗어난, 삶을 초탈(超脫)한 경지에 이른 선사(禪師)의 말과도 같다.

  몸은 절간을 찾아갔지만 마음은 여전히 속세에 발을 딛고 있는 화자 - 절간에 가서까지 속세에서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낼 방법을 묻는 것 자체가 우문(愚問)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자꽃의 현답(賢答)이 나온다. 세상살이 어려움, 엉킨 실타래들 풀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하지 말라는 말이다. 제 한 몸 가누지 못하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몸부림치지 말라는 말 - 우선은 네 마음부터 씻으라는 말이다.
  동자승처럼 예쁘다고 붙은 이름 동자꽃 - 시인은 꽃을 보며 속세의 번뇌를 끊고 마음을 다스렸던 모양이다. 언제 한 번 동자꽃을 보면 나도 좀 물어봐야겠다. 묻고 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는지…… 하긴 시인의 통찰력과 상상력이니 그런 깨달음도 나오지 않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