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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

늙은 포효(咆哮) 꽃을 위한 디카시집 [꽃으로 보는 세상] 늙은 포효(咆哮) 한창땐 조금만 입 벌려도 온 세상 쩌렁쩌렁 들썩들썩, 맥없이 드러누운 지금은 아무리 크게 벌려도 가느다란 소리 한 줄기 나오지 않는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더보기
비수리 꽃 필 무렵 한국의 야생화 시집 (6) [그냥 꽃이면 된다] 비수리 꽃 필 무렵 폭염 열대야를 빗질로 쓸어놓은 아침 마당 후드득 여우비 지나가더니, 빗방울 떨어진 자리마다 푸석푸석했던 흙 풀풀 일어나며 불그레발그레 꽃이 핀다 어릴 때 일찍 죽은 아우의 얼굴에 피던 그 열꽃이 핀다 편히 떠나보내지 못했던 단 한 번도 꿈에 보이지 않아 까맣게 잊고 지냈던 아우 지금쯤 어느 별에서 꽃으로 빛나고 있을까 밤하늘 바라보아도 찾을 수 없는데, 여름 오고 가뭄으로 푸석푸석해진 내 가슴에 열꽃 흩뿌리며 여우비 지나가면 온몸 여기저기 불쑥불쑥 비수리 꽃 피는 소리 몸살을 앓는 반갑게 기쁘게 겪어야 하는 또 하나 슬픈 나의 숙명 한 번도 거른 적 없다 ※ 비수리 : 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각처의 들과 길가에 자생한다. 전체에 .. 더보기
난쟁이붓꽃 한국의 야생화 시집 (6) [꽃이면 된다] 난쟁이붓꽃 환한 햇살 아래서 오늘 너를 보았다 아주 오랜 만에 본 얼굴,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눈물로 젊음을 삼키며 접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무슨 상처인지 애써 묻지 않았다 세상살이 누구든 아픔 하나 없으랴 말문을 닫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찔한 봄날 번잡한 거리에서 핫팬츠 반바지에 팬티스타킹을 입은 아가씨와 숏미니스커트 짧은 치마에 팬티스타킹을 입은 아가씨를 보았다 두 아가씨 모두 스타킹 한쪽 올이 풀어져 있었다 아침에 집 나올 때에는 저렇게 올 한 가닥이라도 풀어지지는 않았겠지 오늘 본 너의 이지러진 얼굴 한쪽을 생각했다 찢어진 한쪽을 쓰다듬으며 어루만지는 또 다른 한쪽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그래, 이것이 꽃이다 우리의 삶이 모두 이렇게 꽃이면 된다, 생각했다.. 더보기
진정한 용기는? 꽃을 위한 디카시집 [꽃으로 보는 세상] 진정한 용기는? 햇빛 한 줄기 못 보는 그늘 억울하다고, 한 순간 코브라로 벌떡 노려보면 뭐하나? 금세 주저앉고 마는, 꽃인데 더보기
국화바람꽃 한국의 야생화 시집 (6) [그냥 꽃이면 된다] 국화바람꽃 어느 날 국화가 바람 났다 아니 바람 들었다고 했다 바람이 들어 집을 나갔다고 했다 여름 끝나는 처서 때면 어김없이 노랗게 꽃을 피우며 그토록 금슬 좋고 정숙하다고 소문났던 국화 새댁이 어느 외간사내와 눈이 맞아 바람 들어 야반도주하듯 집을 나갔는지 도대체 모르겠다며 다들 수군거렸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들리는 풍문에는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보았다고 했다 전국을 떠도는 약초 수집 장사꾼의 입을 통하면 예전의 국화답지 않게 영 얼굴이 딴판으로 변했더라고 했다 얼굴만 변한 것이 아니라 가을에 노란 꽃을 피우던 것이 이제는 하얀 꽃이 봄에 피더라고 했다 하얗게만 피는 게 아니라 가끔은 아주 맑은 연보라의 꽃도 .. 더보기
산쪽풀 한국의 야생화 시집 (6) [그냥 꽃이면 된다] 산쪽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쪽은 들에 살아도 파아랗게 물을 들여 청출어람 제자를 길러내며 꽃다운 꽃 붉게 피기라도 하지 이름값은커녕 쪽에 반의반도 따라가지 못하면서 산쪽풀이라고 맨날 하얗게 道나 닦는다며 높은 곳에 꼿꼿이 서서 그것도 꽃이라고 쪽인 양 대우 받으려고 하면 다 된다는 거냐 ※ 산쪽풀 : 대극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남부지방 섬의 산기슭에 무리지어 자생한다. 전체에 털이 없고, 뿌리줄기는 흰색인데 마르면 자줏빛을 띤다. 줄기는 네모진다. 잎은 마주나는데 긴 타원형으로 잎자루가 있고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암수한그루로서 3~5월에 녹색의 꽃이 피는데, 암꽃은 윗부분에 피고 수꽃은 밑부분에 핀다. 9월에 둥근.. 더보기
[잎] [꽃] 한국의 야생화 시집 (6) [그냥 꽃이면 된다] 쪽 풀잎마다 하얀 이슬 맺히는 아침 길을 나서다 여름을 괴던 바지랑대 위로 높아진 하늘을 보았다 쪽빛 가을이었다 이쪽저쪽을 둘러봐도 온통 푸르른 하늘 저토록 가을이 높푸른 건 마디마디 붉은 태양을 품고 쪽풀이 여름내 뜨겁게 꽃을 피워 올렸기 때문, 청색이 남색에서 나왔다는 청출어람 꼭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마른장마 여름가뭄에도 끄떡없이 폭염주의보 열대야에도 아랑곳없이 쪽쪽 잎은 짙푸르러 오르고 줄기는 점점 붉어져 푹푹 땀에 절어 발갛게 꽃 피우더니 결국은 시퍼렇게 차디찬 가을을 불러다 놓았던 것이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차이는 얼마일까 길게 뜨겁던 여름을 보내고 이슬 젖은 바람을 쐬면서 쪽풀과 가을하늘의 상관관계를 이차방정식과.. 더보기
가을 세바람꽃 한국의 야생화 시집 (6) [그냥 꽃이면 된다] 가을 세바람꽃 뜨겁게 뜨겁게 땀을 훔쳐내며 설악에서 한라까지 후볐어도 꼭꼭 숨어 보여주지 않던, 그렇게 봄여름을 바람으로 흘려보내고 서쪽하늘에 걸린 해 바라보며 산비탈에 섰을 때 그제야 내 안으로 들어와 화안히 가슴 열어제친 얼굴 그 한 순간의 희열도 이제 노을로 붉어지면 오그라드는 꽃잎을 눈물 없이 또 어찌 바라보랴 석양은 발밑으로 길게 그림자 선을 긋고 있는데 언제쯤에야 별사탕 같은 열매 한 알 맺을 수 있을까 바람꽃이면 다들 핀다는 봄도 여름도 아닌 때 한참 늦은 가을에 와서야 꽃 피우는 네 뜻을 아직 나는 알지 못하겠네 ※ 세바람꽃 :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의 산기슭에 자생한다. 땅속 뿌리줄기는 짧고 굵다. 뿌리에서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