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수은주가 높게 치솟으며 더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올해의 봄은 유난히도 무더운 날씨로 아예 봄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매스컴에서는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징후라고 과학자들의 분석자료를 인용하면서 보도하고는 앞으로는 해마다 봄다운 봄을 보기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산천초목들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봄으로 인해 어리둥절한가 봅니다. 예전에는 5월이 되어야만 피는 꽃들이 4월이 되자마자 서둘러 피워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천천히 여유 있게 봄을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되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일어납니다. 오는 5월 4일은 저를 시인의 길로 이끌어 주신 恩師 李聖善 선생님의 逝去 1週忌가 되는 날입니다. 제가 서울 생활을 하기전, 속초에서 오랜 기간을 물소리詩낭송회의 총무로 있으면서 선생님을 상임시인으로 모시고 함께 활동할 때, 외롭지만 바르고 참된 시인의 길을 가라고 언제나 일러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어 목이 메이게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2001년 5월 4일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고 하늘에 올라 별이 되셨습니다. 평소에도 1주일이 멀다하고 산을 오르시며 등산을 무척이나 좋아하셨고, 젊은 청년 못지 않게 건강하셨는데, 속초 교동 자택에서 사모님이 목욕 간 시간에 혼자서 자는 듯 영원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회갑의 연세에 유족들에게 한 마디 유언도 없이 책상 위에 새 시집을 출간할 원고를 고스란히 펴 두고 가벼운 산책을 가듯이 저 세상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습니다. 벽에 걸어 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 선생님의 詩 <도반> 전문 선생님께서는 죽음 직전 근간에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는지 가끔 존재론적 사고를 열어 보이며 죽음의 그림자를 詩 속에 형상화하기도 하셨으며, 최근의 3번째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자주 죽음을 화제에 올리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무시로 드나드는 듯하셨다고 합니다. 평소 문명의 거센 파도를 저만치 비켜서서 외길을 걷는 고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즘의 대중문화 혹은 문명의 첨단 다원화 세태는 강 건너 불 보듯 하며, 항상 옛 시인처럼 혼자 운동화 신고 타박타박 산길을 걸으며 곤충과 나무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언제나 우주의 대질서 앞에 숙연히 옷자락을 여미며, 무소유가 곧 삶의 지혜라고 생각하며 산업화 세태의 물질문명과는 타협을 거부하셨습니다. 우주의 광활한 자연 질서 속에 몸을 줄이고 한 잎의 꽃잎처럼 가볍게 흐르고자 하셨습니다.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 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 선생님의 詩 <미시령 노을> 전문 길을 가다가 바라본다 나뭇잎이 어제는 저기 떨어지고 오늘은 여기 흩어져 앉는다 어느 것은 일찍 지고 어느 것은 늦게 진다 가을 가득한 이 삶의 소리 며칠 전까지 지상을 푸르게 채우던 생명들 오늘은 누른빛 붉은빛으로 변해 대지에 눕고 바람에 뒹굴고 허공에 날린다 그러나, 아아 무엇이 차이랴 여기 떨어지고 저기 앉는 것 먼저 지고 오래 남는 것 그분의 피리의 연주가 이 구멍은 먼저 닫히고 저 구멍은 늦게 닫히는 어떤 음은 길게 다른 음은 짧게 작곡된 생명 모두는 우주 큰 연주 속의 한 가락 - 선생님의 詩 <하늘 악보> 전문 선생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늘 별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별은 천상 저 멀리 있고, 사람은 하염없이 낮은 지상에 머물러 있는 존재인지라, 그 먼 별까지 기도가 전해지려면, 그리고 그것이 응답이 되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으므로, 선생님께서는 매일 밤마다 별을 쳐다보며 소원을 비셨습니다. 지나치게 많이 쳐다본 탓에 "별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걱정하셨고, "가슴 어지러움을 황홀히 헹구어"내시며 소원을 빌었던 선생님이셨습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 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선생님의 詩 <별을 보며> 전문 하지만 소원을 비는 동안 몸은 지상에 묶여 있고, 그렇기에 별이 되기에 앞서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먼저 나무가 되기로 하셨습니다. 뿌리는 땅에 묶여 있지만 가지는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나무처럼 그렇게 마음과 영혼을 먼저 하늘로 보냈고, 그리하여 하늘과 땅의 소식을 주고 받는 안테나가 되기도 하였으며, 별과 바람의 소리를 전하는 악기가 되기도 하셨습니다. 한밤 짐승이 되어 울까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광야에 웅크려 하늘을 본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마음은 하늘에 살아야지 이 가지 저 가지를 헤매며 바람으로 울어도 영혼은 저 하늘에 별로 피어야지 절망으로 울던 마음 그 가난도 찬연한 아픔으로 천상에 빛나야지 광야에 웅크려 다시 하늘을 본다 마음 잎새에 빛나는 별빛이어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울까 - 선생님의 詩 <몸은 지상에 묶여도> 전문 선생님께서는 밤마다 별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詩로 만들어 전하셨는데, 그대신 하늘의 이야기를 밤새 들어주어야만 했고, 대체로 하늘은 지상의 아픈 일들만 들려주곤 했기에, 선생님의 새벽은 늘 눈동자가 젖어 있었습니다.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 선생님의 詩 <빈 산이 젖고 있다> 중에서 선생님께서는 별이 되고자 소원을 비는 동안,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살면서 하늘과 우주와 영혼으로 교신하였고, 늘 "병 하나는 지니고 살아야 아름답다"(牛黃)는 신념으로"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에 꽃을 바치는 사람"(풀잎의 노래)이라고 주장하면서 낮이면 하늘에 꽃을 바쳤고 밤이면 그 하늘을 걸어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설악산을 지붕"으로, "동해를 마당"으로 삼았으며, "붉고 싱싱한 햇덩이"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숯불에 구워 아침상에 올"(나의 집)리곤 하던 선생님이셨습니다. 한밤 촛불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산 아래 붓꽃 한 자루"(붓꽃)이었고, "찻잔에 산을 띄워 달여 마"(山茶)시기도 하였던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게 별이 되고자 소원하시며 일찍부터 영혼을 하늘로 보내고 몸만 지상에 머물러 있었건만, 그마저 무척이나 부담스러워 하며 당신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로부터 해방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더니, 마침내는 하늘에 올라 별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지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불이 되리 하늘의 불이 되리 세상의 온갖 밧줄에 묶이어 살아온 나를 죽어서도 끝내 밧줄로 다시 묶어 땅 속에 버려둘 수는 없어 하늘로 가는 아궁이에 장작처럼 누워 온 몸에 불을 댕겨 어두운 땅 한 번 환하게 빛내고 하늘로 가리 - 선생님의 詩 <불타는 영혼의 노래> 중에서 내가 죽으면 동트는 하늘로 덮어 주세요 열광하는 그 빛으로 덮어 주세요 - 중략 - 가슴에는 오직 별이 있어요 가슴에만 뜨는 별이 있어요 별과 함께 나를 묻어 주세요 - 선생님의 詩 <동트는 하늘을 보며> 중에서 아내여 내가 죽거든 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 언덕 위 풀잎에 뉘여 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 이불처럼 나를 덮여 다오. 그리고 가끔 지나는 사람 있으면 보게 하라. 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 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 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 피 묻은 놀이나 한장 내려 덮어 두었노라고. 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 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 선생님의 詩 <노을 무덤> 전문 2001년 5월 햇살이 유난히 화창했던 날, 선생님께서 詩로 유언하셨듯이 선생님의 육신은 재가 되어 설악의 골짜기에 뿌려졌고, 영혼은 불이 되어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곤 하늘에서 별이 되셨습니다. 이제 곧 선생님의 1週忌가 다가옵니다. 문단에서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들이 선생님을 기리고자 뜻을 모아 2002년 5월 3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 256번지의 선생님께서 출생하셨던 바로 그 자리 선생님의 생가에서 詩碑를 제막합니다. 이에 불초 제자는 선생님의 1週忌를 맞아 詩碑 제막식에 앞서 다시금 선생님을 그리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언제나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선생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본받으며 바르고 참되게 詩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외람되지만 선생님의 詩 <별을 보며>에 기대어 화답합니다. 별꽃 김 승 기 이제는 더럽혀질 일 없겠지요 쳐다볼 일도 없겠지요 너무나 하늘 쳐다보고 별을 쳐다보아서 하늘이 별이 더럽혀질까 걱정하더니 하늘에 올라 별이 된 지금 어떻는가요? 술 취한 세상 땅만 보고 걷는 길 흔들리는 발걸음 멈추고 서서 고갤 들어 봅니다 이제서야 하늘 쳐다봅니다. 별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커다란 하늘엔 있어야 할 별이 보이지 않고 땅의 한 구석 진창 굴헝에서 하얗게 꽃이 피고 있습니다 내게 미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쳐다볼 때마다 왜 자꾸 별이 땅으로 내려와 꽃으로 피어나는가요? - 지금은 하늘에 올라 별이 된 시인 이성선 선생님의 詩 <별을 보며>에 기대어 화답하며 추모합니다. 새벽지기님, 故 李聖善 선생님의 1週忌를 맞아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추모의 정을 담아 백성기 작곡 <비경>을 신청곡으로 띄웁니다. 그럼 선생님의 詩碑 제막식에 다녀오겠습니다. 2002년 4월 23일 우리의 꽃, 야생화의 시인 夕塘 金承基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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