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다보면 가끔은 아무 것도 하기가 싫은 때가 있다. 늘 바쁜 일상에서 쫓기고 매달리며, 언젠가는 단 한 시간이라도 나를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던 나만의 시간을 모처럼 어렵게 겨우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그런 시간의 여유를 가졌음에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때가 있다. 그 동안 벼르고 미루어 왔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 여유 있는 시간인데도, 손 발 하나 까딱하기가 싫고 그저 침대에 벌렁 누워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멍청하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푸른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가 싶다. 지금은 오전 9시 30분, 저녁 7시에는 거의 일년만에 얼굴을 보는 그리운 사람을 만날 약속이 있고, 저녁 6시에 출발하면 되니까 지금부터 대략 7시간 정도는 무엇을 하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여유 있는 시간인데, 왜 이렇게 허탈스럽고 맥이 빠지는 것일까. 지난 주부터 이루어진 약속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못 보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흥분되어 두근두근 벌렁벌렁 가슴이 설레었고 3일밤을 잠을 설쳤지만, 지난 밤에는 잠도 잘 잤는데, 아무리 약속 시간이 어서 빨리 다가오길 기다리며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고 있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왜 이렇게 맥이 탁 풀리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은 걸까. 밖을 나가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며 사색에 잠겨도 좋고, 가깝고 야트막한 산을 등산해도 좋고, 아니면 방안에서 책을 읽거나 詩를 몇 편 읽어도 되고, 컴퓨터를 켜고 글을 올려도 되고, 그것도 아니면 하다 못해 케이블 TV를 봐도 될텐데, 가을 햇살이 탐스럽게 영글어지는 이 좋은 시간에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걸까. - 가을 햇살이 영글어 알밤을 쏟듯 머리 위에서 탐스럽게 떨어져 내립니다. 이렇게 가을이 영글려고 지난 여름이 그렇게도 지겨운 비를 뿌렸나 봅니다. 온 국토와 많은 사람이 태풍과 폭우로 찢기운 상처를 치유하느라고 애타는 가슴이 뭉청뭉청 무너져 내리는데,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청명한 가을 하늘은 마냥 해맑게 웃고만 있습니다. 그래야겠지요. 상처가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만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억지로라도 밝은 웃음을 띄우고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없던 힘이라도 다시 새롭게 솟아 나오겠지요. 오늘은 연신내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해 남산詩낭송회에서 잠깐 얼굴을 보았던 그리운 얼굴의 文友 樹幽堂 小野 河玉伊 시인을 보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약속의 이행이었습니다. 서울의 동쪽인 화양리에서 서울의 서쪽인 연신내까지는 지하철 열차로만 1시간이 넘고 왕복시간이 2시간이 넘는 참으로 멀고 먼 만남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 존경해 오던 시인 오만환 선생님과 함께한 세 사람의 즐겁고 행복한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서로의 歸家 시간 때문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서로 나누는 화제의 정은 따뜻하고 진지했으며 무궁무진하였습니다. 단지 詩를 쓴다는 것 하나로, 처음 만나도 이미 옛날에 수 없이 만난 것처럼 그저 친숙한 자리, 당연히 화제는 글 쓰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글 쓰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 文人들의 만남 자리는 그렇게 즐거운 천국이었습니다. "河시인, 고마워요. 오늘 정말로 행복했어요. 바쁜 중에도 그대가 만들어 준 이 행복한 시간 항상 글 쓰면서 가슴에 간직할래요. 언제고 또 다시 오만환 선생님과 함께 이런 자리 마련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추석엔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사무실에 앉아 일을 했습니다. 흐린 날씨로 청명한 하늘은 보지 못햇지만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둥그런 보름달이 어찌나 밝은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잠시 일손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성이게 했습니다. 사무실 언덕에는 꽤나 큰 언덕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는 흰등골나물이 군락을 지어 자생하며 하얗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 흰등골나물의 하얀 꽃들이 달빛을 받아 소금을 흩뿌려 놓은 듯 눈이 부셨습니다. 그 위로 별들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키우는 시골의 메밀꽃밭이 생각이 나서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습니다. 오는 10월 7일은 음력으로 9월 2일, 아내의 생일입니다. 가난한 내게 시집와 병든 시어머니 간호하면서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몸 고생 마음 고생 하는, 멀리 떨어져 겨우 3주에 한 번씩 못난 남편의 얼굴을 보는, 마주하고 있으면 애처로워 저절로 눈물이 글썽이고 코끝이 찡해져 오는 그런 아내의, 내게 시집 와서 19번째 맞이하는 생일입니다. 20여년의 공직생활에서도 거의 3분의 2를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이제는 더욱 멀리 떨어져 앞으로도 계속 3주에 한 번씩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너무도 가엾은 아내입니다. 연료보다도 정비료가 더 많이 들어가는 낡은 소형차를 운전하는 것이 항상 마음을 아프게 해서 지난 해의 생일에는 어떻게 겨우 자동차를 새로 구입해 선물했지만, 올해에는 조그만 선물 하나 준비해 줄 수 없는 가난한 시인이 그저 마음으로만 축하해 줄 수밖에 없는 아내의 생일, 다행히도 마침 휴무라서 그냥 달려가 얼굴 마주하는 것으로 선물을 대신할 수밖에는, 그렇게 넘길 수밖에는...... 새벽지기님, 신청곡과 함께 아내에게 바치는 詩 한 편 보내오니, 청취자 분들과 함께 제 아내의 생일을 축하해 주세요. 신청곡은 유은선 작곡 <한국 여인을 위한 자화상>으로 10월 7일 아침, 아내의 생일날에 "여보, 사랑하오." 하는 말을 대신하며, 아내와 함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 듣고자 합니다. 탱자나무 김 승 기 하늘아 너를 너무 아프게 했구나 온몸의 가시 나를 지킨다는 방패가 네 가슴을 찔러대는 송곳인 줄 몰랐구나 너의 끝 없는 사랑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따뜻한 햇살로 긴 팔을 둘러 감싸안으며 예쁘장한 꽃 열매를 선물해 주는데, 하늘아 오히려 행복인 줄 모르고 감귤 되지 못한다는 열등감 하나로 받기만 하는 사랑을 아프게 아프게 찌르기만 했구나 평생 그리움으로 가슴 저려도 주는 사랑이 더 큰 행복이란 걸 늦가을 열매를 떨구고서야 알았구나 하늘아 용기 있게 주지 못했던 사랑 이제는 주어야지 때 늦은 후회가 점점 더 가시를 굵어지게 하는구나 * 탱자나무 : 운향과의 낙엽성 활엽 관목이다. 5월에 백색의 꽃이 피고, 9월에 열매가 노랗게 익는다. 2002년 10월 1일 별빛 초롱초롱한 밤에 우리의 꽃, 야생화의 시인 夕塘 金 承 基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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