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진 늦가을, 아니 엊그제 입동을 지냈으니 이젠 초겨울임이 분명한데도 머리 속에서는 여전히 가을로만 여겨지고 있는 이 깊은 가을의 끝자락, 길가에 가로수로 서서 여름을 푸르게 했던 은행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을 들이며 낙엽으로 길 위에 쏟아놓고 있습니다.
싸늘한 먹물 빛으로 흐린 하늘이 땅 위로 무겁게 내려앉더니, 밤이 되면서 마침내 차가운 비를 흩뿌리고 있습니다.
바람까지 휘몰아치면서 마음을 더욱 움츠려들게 하는 스산한 날씨입니다.
樹幽堂 小野,
오늘 아침, 오랜만에 그대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하루 하루를 너무나도 바쁘게 생활하는 그대를 지켜보면서 늘 가슴이 조마조마한 안타까움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는데,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 메시지에 기뻐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메일을 열어보고 난 지금은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외롭고 울적했으면 내게 이렇게 하소연을 했을까 생각하며, 마음을 드러내어 기댈 수 있는 상대가 나라는 것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요.
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듯이 족쇄를 채우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 그 족쇄를 푸는 것도 또한 자기 자신인 겁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자신을 뒤돌아본다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바쁜 와중에서도 자신을 뒤돌아보려는 생각을 하고, 몸이 많이 쇠약해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몸을 추스르고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산을 다녀왔다는 것에 조금은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만, 늘 지켜보면서 항상 가슴 조이며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몸보다 마음이 더 쇠약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적당히 휴식을 취하길 바래요.
기계도 계속 돌리기만 하면 고장이 나는 법, 하물며 사람의 몸뚱이에 있어서야, 예외일 수는 없잖아요.
항상 단정하고 꼿꼿하게만 생활하며 살려고 애쓰지 말아요.
너무 감정을 억제하지만 말고, 때로는 솔직하게 표현하세요.
힘이 들면 힘들다 하고, 외로우면 외롭다 하고, 아프면 아프다 하고, 꽥꽥 소리도 질러 보고,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자신을 풀어놓는 것도 건강하게 사는 지혜라는 것을 생각하세요.
스스로 감정을 추스릴 수 없을 때에는 망설이지 말고 전화를 하세요.
아무리 밤이 늦은 시간이라도 상관하지 말고 전화해서 서로 마음을 기대고 이야기하다 보면, 울적함도 외로움도 한결 수그러들 테니까요.
일하는 날에는 물론 아침 8시까지 밤을 꼬박 새우지만, 오늘같이 쉬는 날에도 글을 쓰거나 책과 씨름하다 보면 하얗게 밤을 지새우게 되고, 그리하여 새벽 5시나 6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기를 밥먹듯이 하니까 언제든지 전화를 받을 수가 있어요.
밤을 하얗게 새우다가 이른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2시간 동안 방송되는 FM국악방송의 「솔바람 물소리」를 듣는 맛은 아주 일품이라서 그대에게도 권해 보고 싶어요.
樹幽堂 小野,
그대의 울적하고도 쓸쓸한 마음을 위해서 졸시 한 편과 함께 음악 띄워 보냅니다.
구절초
김 승 기
어린 시절
들국화라는 꽃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들국화로 부르다가
서른을 넘어 한참을 더 보내고서야
구절초뿐 아니라
쑥부쟁이들과 개미취 벌개미취 버드쟁이도 모두
들국화라는 걸 비로소 알았다
꽃을 찾아 詩를 쓰며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을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오류를 바로잡는 시간이 너무 길었구나
뜰에서 기르는 국화도 집을 나가면
들국화로 불려지는 것,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 알고 그르쳐 왔을까
얼마큼 동뜬 세월을
저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으로 또 아파할까
이제 긴 여름이 끝났으니
구절초를 가슴에 심어 놓고
빈 산 빈 들 찬바람 불 때마다
웃음의 꽃그늘 가득 짙은 향을 채우고 싶다
* 구절초 :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9-10월에 백색 또는 붉은빛이 도는 백색의 꽃이 핀다.
음악은 조광재 작곡 「그리운 임(연주곡)」을 FM국악방송 <솔바람 물소리>의 새벽지기님께서 선곡하여 띄워줄 겁니다.
樹幽堂 小野,
이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그대의 얼굴에서도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생활을 가꾸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 언제나 긍정적이며 낙천적으로 푸르게 사는 마음 자세를 잃지 않도록 합시다.
그럼, 안녕......
2002년 11월 12일 깊은 밤에
우리의 꽃, 야생화의 시인 晴林堂 淸樹居士 夕塘 金 承 基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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